2014년 6월 30일 월요일

독립기획자와 자족적 글쓰기 문화 (컨템포러리 아트저널 Contemporary art journal 봄호. 2014. vol.17)

* <컨템포러리 아트저널 Contemporary art journal> 봄호(2014. vol.17) 특집 '허위의식과 저항 사이의 큐레이팅'의 청탁으로 쓴 글. 




독립기획자와 자족적 글쓰기 문화



반이정. 미술평론가 


작가와 전시를 연구 과제로 삼는 점에서 평론가나 기획자는 동일선상에 있다. 평론가의 글과 기획자의 글 사이를 확연히 가르는 질감 차이를 찾긴 어렵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이 기획한 전시 서문을 쓴 기획자의 평문 정도일 거다. 제작 과정을 근접거리에서 소상히 지켜본 기획자는 완성품에 대한 사전(事前) 비평을 내놓을 테고, 과정보단 결과물에 전념하기 쉬운 평론가는 사후(事後)적 비평을 내놓을 게다. 이 때 기획자의 평문은 작가의 의도나 전시 기획안을 충실히 옮기는데 집중한다. 작가/전시에 친화적인 평문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미술관 학예사건 갤러리 큐레이터건 그가 속한 전시장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기 어려워서다. 기획자의 글은 고밀도의 정보를 담더라도 결국 작가/전시에 편향적인 비평으로 기운다. 반면 전업 비평가는 조직의 이해에선 자유롭지만 제작 의도와 기획의 취지를 소홀히 다룰 가능성이 있다. 다만 호오가 분명하고 주관적인 판단에 전념한 평문의 모양새를 띤다.

작가/전시와 필자가 맺는 관계항에 따라, 기획자와 평론가의 글은 이 같은 질감 차이를 낳을 게다. 그렇지만 이런 관계항의 조건을 제한다면 기획자와 평론가 사이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글의 질감 차이를 발견하긴 솔직히 어렵다. 이는 미술 평론이 지니는 동조성-평론이 지니는 글의 일반적 형식-에 필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가담하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필자 개개인의 문체의 차이라면 모를까, 기획자와 평론가를 분간할 만큼 둘을 선명하게 가를 평문의 차이는 찾기 어렵다. 더구나 전시 기획을 병행하는 평론가라면 그가 기획한 전시 서문에서 작가/전시 친화적인 평문을 내놓는 터이니 결국 기획자의 비평 스타일을 고스란히 답습할 게 아닌가.

때문에 전업 미술 평론가와 공정하게 비교할 상대를 찾자면, 자신이 기획한 전시의 글을 쓰되 소속의 논리에 예속되지 않고 비평 소신을 유지하기 쉬운 기획자를 찾아야 할 게다. 이 조건에 그럭저럭 근접한 기획자로 독립 기획자를 꼽을 수 있다. 무소속 독립기획자의 계보는 이미 퍽 길지만, 전대 독립 기획자들이 기관에 영입되거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가 많아서 차세대 독립기획자를 살펴보자. 차세대 독립기획자 그룹은 전대와 질감 차이가 느껴진다. 차세대 독립기획자들은 대안 공간 형태의 전시장을 공동 운영하거나, 콜렉티브 형식의 공동 기획으로 소신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활동은 독보적인 닫힌 구조보다 개방적이고 느슨한 연대에 기초하는 것 같다.

여기서 언급할 차세대 독립기획자란 2010년대 후반께 활동력을 보인 이들로 한정한다. 전대 독립기획자와의 변별점을 잘라 말하긴 어려워도 몇 가지 공유하는 성격은 있는 것 같다. 정통 미술이론 계열 전공자가 많았던 전대와 달리, 제도 미술 전시의 타성적인 정서와는 거리를 두는 차세대 독립기획자들은 미술이론 비전공자 출신도 많은 것 같다. 박재용과 장혜진의 독립기획그룹 ‘워크온워크’의 첫 기획전 <힛앤런: 흩어지는 전술>(2011년)은 “중심이 없는 프로젝트”로 “‘공공 공간’에서 진행하는데, 여기서 공공 공간이란 서울 시내 공공 공간으로 어떤 작가들은 이를 인터넷으로 생각해서 웹을 기반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전시”도 아니어서 “하루나 몇 시간 전에 상당히 임박해서 공지를 하기 때문에 길 가다가 보게 되면 보는 것이지, 작정하고 작업을 봐야겠다고 해도 보기 힘든” 남다른 기획 전시란다. 이러니 작품이 놓일 시공간이 대개 확정된 제도 미술계의 기획 전시와 비교할 때, 작품과 시공간 사이의 관계를 대하는 태도부터 차이가 난다.

경계가 불분명한 전시회를 내놓는 차세대 독립 기획자들의 태도는 평문을 대하는 태도로 연장 되는 것 같다. 대안적 전시 공간 ‘시청각’을 2013년부터 공동 운영하는 현시원에게서 그런 면모가 관찰된다.
“누군가를 흥미롭게 하기보다 나를 흥미롭게 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 지금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현시원은 학술적 깊이를 어중간하게 과시하는 고답적인 비평 성향에서 빗겨나 있다. “큐레이터라는 이름 안에 제가 하는 활동을 꼭 담아야겠다는 생각은 아니고, 다만 현대미술을 공부했고 자유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대해 항상 애정” 갖기에 “꼭 미술이 아니더라도 디자인이든 건축이든 나를 하나의 사람으로 만들어 온 한국사회의 이미지를 어떻게 글쓰기 형태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것”으로 관심사가 이동한 경우이다. 현시원의 비평적 관심이 전 방위로 표현되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현시원의 첫 책 <디자인 극과 극>(2010년)에는 동시대 한국 미술가들의 작업이 듬성듬성 도판으로 등장하나 미술평론집은 아니다. 현재적 삶에 관여하는 일상 사물들을 두루 관찰한 한 후 상호연관성이 낮은 사물들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에 찾아내 독자적으로 풀이한 시각 에세이집이다. 미국에서 제작된 부피가 풍성한 우주복과 한국에서 제작된 환경미화원의 형광색 반짝이 유니폼이 동일 선상에서 언급된다. 혹은 한국 보수단체가 대북전단을 담아 날릴 때 쓰는 대형풍선과 남성 피임기구 콘돔을 신축성 있는 비닐 재질이라는 공통점으로 나란히 묶어 논하기도 한다. 더러 미술인의 작품이 책에 인용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의 중심은 미술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꽂힌 일상 사물이다. 장르적 사유에 연연하지 않는 저자의 관심은 ‘큐레이터를 자극한 사물들’라는 부제를 붙인 <사물 유람>(2014년)이라는 두 번째 책으로 연장되었다. 

견고한 미술언어의 규약에 예속되지 않기에 비평 대상은 유연하게 열려있다. 책의 타깃도 보편적 독자이기 보다, 필자가 자족하는 글 혹은 필자와 호기심을 공유할 소수의 독자층을 지향하는 것 같다. 이런 집필 태도는 전시 기획으로 다시 피드백 되는 것 같다. 차세대 독립 기획자의 전시는 소수만이 공유하는 미학에 지배되는 것 같아서다. 이들이 기획한 전시회를 보면, 출품된 작품들이 왜 같은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지 단번에 눈치 채기가 난감할 때가 많다. 관객을 흡수할 기획안의 원심력은 그래서 낮다. 전시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기획자가 쓴 산문에 가까운 서문을 참조해야 출품 작품들 사이의 유기성이 느슨하게 확인된다. 이처럼 원심력이 낮은 전시에 정작 기획자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전시 기획과 평론에 임하는 독립기획자들의 입장은 훨씬 자족적 가치에 기울어 있는 듯하다.

차세대 독립 기획자를 규정할 또 다른 특징은 높은 온라인 친화성과 느슨하게 열린 공동 작업이다. 글쓰기마저 협업을 택하는데, 독립 기획 그룹 ‘워크온워크’는 글을 발표할 때 박재용과 장혜진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표기할 정도다. 기획과 비평을 겸하던 전대(박만우, 이영철)가 장문의 난해한 글에서 자기 독보성을 찾으려고 심혈을 기울인 것과 분명 대조적인 광경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활발한 활동 양에 비해 평문 생산에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보다 시각 정보가 훨씬 호소력을 발휘하는 동시대에 이들이 보내는 진솔한 응답 같다. 협업으로 결과물에 다다르는 차세대 독립기획자들은 전시 기획자의 고정된 역할마저 해체하는 것 같다. 전시회를 원거리에서 제어하던 정통 기획자의 숨어있는 초상과는 다르다.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에 스스로 가담하기 일쑤다. 홍성민이 기획한 <19금 퍼포먼스 릴레이>(2011년)에 박길종과 현시원이 공동 기획한 <골든>도 무대에 올려 졌는데, 기획자 현시원은 이 기획 공연에서 연기자로 출연한다. 작가와 기획자를 가르던 고정 배역을 부인하는 광경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큐레이션십의 변화에 대한 박재용의 답변에서도 확인된다. “관리Cura(care) 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Produce하는 방향. 교육, 공공참여public engagement라는 방향으로” 기획자의 지위가 변했기 때문에 “그런 변화 속에서 기획자는 정형화된 틀 안에 안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차세대 독립기획자들이 공유하는 관심사 중 하나는 사회 관계망에 미술(기획)이 관여하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이는 2011년 독립기획자들의 집단 대담을 다룬 마가진(magazyn.co.kr)의 글에서 재확인 된다.

“개인적인 관심은 예술의 역할이라던가 사회 내에서의 예술의 사회적 개입에 관한 것이에요.”(신윤선), “큐레이터도 인터넷 기사나 신문을 보면서 사회정치 이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코멘트를 하는 차원인 것 같아요.”(장혜진), “현대미술에서는 ‘현대’가 ‘미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분들과 함께 동시대 일들을 얘기하고, 그것을 동시대 관객들과 나누는 것이 현대라고 생각합니다.”(양지윤).

동시대 시사 이슈를 곧잘 기획 소재로 끌어오기에 주재환 최민화 같은 민중미술 1세대가 전시에 초대된다. 세대 차이가 큰 민중미술가들이 구축한 정치사실주의 미학으로부터 조형적 풍자에 주목하되 이념적으로 깊게 연루되지 않고, 미적 무정부주의에 천착하는 경향도 띤다. 이들이 시사 이슈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기획한 전시 <지휘부여 각성하라>에 참가한 작가 남화연을 설명할 때 현시원이 쓴 표현대로 “지적이고도 심각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에 가깝다. 민감한 사회 현안에서 두루 기획 소재를 발굴함에도, 기획안의 원심력이나 관객과의 연결고리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는 까닭도 이 때문이리라. 2013년 말 시청각의 개관전 <no mountain high enough>의 전시 서문에서 현시원은 이 전시가 “인왕산 주변의 지도를 당대 작가들의 시각으로 조망하고 재구축하려는 ‘망상’에서 시작되었다”고 소개한다. 

1947년 지어진 한옥 가정집을 개조한 전시장 ‘시청각’은 실제적 삶에서 고립되지 않으려는 ‘시청각’ 운영진의 태도를 표상한다. 전시의 형태나 전시 서문 모두에서 어딘지 헐렁한 인상을 주는 ‘시청각’의 개관전 <no mountain high enough>는, 외부의 무반응에도 불구하고 줄곧 큰 스케일로만 승부를 걸려는 제도권 전시장의 전시 형태나 서문의 관성과는 다른 노정을 걷는다. ‘시청각’ 전시회 개막식에 모여들어 전시를 관람하고 서문을 읽는 소수의 방문자들의 관심은 그들의 내부를 진솔하게 지향한다. 외부의 반응이야 어떻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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