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1일(토) 15시 상연분 '슬픈연극'을 봤다.
정신적 공황에 빠졌던 부산(비엔날레)에서 상경한 다음 날이라 심신의 피로가 많이 누적된 상태.
이 날 일정은 일민미술관 방문 → 슬픈연극 관람 → 인사아트센터 방문 → 황학동의 어느 공연 관람 순이었고, 모두 소화한 후 귀가했다. 보편적 대중이 소비하는 가장 손쉬운 허구적 스토리텔링은 이미 영화나 TV드라마 정도로 좁혀졌을 거다. 집에 TV가 없는 나는 TV를 일절 보지 않지만, 시사회로 한달 10편 내외의 영화를 보니 영화에 관한한 누구보다 많이 보는 편이리라. 고교생 때 더러 즐거보던 연극이었으나, 자발적으로 관람하지 않게 된 요즘 <슬픈연극>은 오랜만에 연극 관람이다. 그런데 지난 자료를 검색해보니 드물더라도 연극을 봐왔더라.
가장 근래 관람한 연극은 '아스코' 도전자인 유병서씨가 참여하는 '변방연극제'에 올려진 어느 연극 한편(엮인글).
또 그보다 앞서 본 마지막 연극은 서울대 인문관에서 학생들이 꾸린 연극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로 서울대 대학원 협동과정 공연예술학 전공자들의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관람 시기는 작년 3월( 사진보기 ).
어제 관람한 <슬픈연극>은, 기사에 따르면 극단 차이무의 2004년 작품이란다. 이후 배우를 교체해가며 2005년과 2006년에도 연이어 무대에 올린 극단 차이무의 간판 작품 쯤 되는 모양이다. 나는 연극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일절 확인하지 않고 극장을 찾아 매표소 앞에 붙은 남녀 3쌍, 총 6명의 배우들이 모두 무대에 오르는 줄로만 알고 입장했다. 알고보니 2인극으로 배역을 로테이션하는 3쌍의 남녀배우 편성이었던 거다. 내가 관람한 어제는 '강신일-남기애'조의 무대였는데, 그 사실도 모른 채 극장에 갔다. 좌석에 앉아 뒤를 둘러보니 전석 매진으로 보였다. 관련 기사를 찾아봐도 매진일 때가 많은 연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기사들 상당수가 내가 본 '강신일-남기애'조의 연극 무대 사진을 사용하고 있었다. 강신일의 인지도 때문에 선호되는 모양이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연극판의 사정을 고려할때, <슬픈연극>은 대학로에서 나름 선전을 하는 연극인 셈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동시대 연극의 처지에 관해서 줄곧 생각하게 됐다. 예전에 국내 고전 음악계가 내놓는 오페라 공연에 관해, '가창, 연기, 스토리, 무대'라는 오페라의 기본 요소들을 현세대에 맞게 업그래이드를 하질 않고, 구시대적 코드에 안주해서 동시대인의 공감을 사기 어려울 거라고 적은 바 있다. <슬픈연극>도 어떤 점에선 갱신보다는 일반적 대중 코드와 배우의 연기/혹은 지명도에만 매달리는 느낌을 받았다. 결혼 직전 첫눈에 반했다는 소싯적 사연을 부부가 번갈아가며 관객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고백 형식을 띤다. 그렇지만 극의 마지막은 슬픈 귀결로 이어진다. 때문에 연극 제목만큼 연극의 비중을 일반 관객의 손쉬운 감정선에 기대는 최루성 높은 작품이다.
극중 부부가 자신의 과거 개인사를 회상하는 과정에 열거하는 박정희 저격(1979), 중동 아시안게임(1986), 중동 건설수출(1980년대 후반), 문민정부(1990년대 초반), 외환위기(1997년) 따위의 한국 현대사는 중년관객의 향수에 호소하기 쉬울 것이다. 또 그런 현대사 사이에 촘촘히 틀어박힌 자신들의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는 형편 따위를 전부 듣고나면 이 극중 부부가 직면한 어떤 슬픈 귀결에 관객들이 저항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부부 사이의 풋풋한 정과 이들이 직면한 불행에 연민이 쏟기 쉬운 스토리텔링이다. 감정선이 흔들리는 때도 실제 몇번 있다. 어쩌면 그 점이 영화가 아닌 관객과 무대의 거리가 즉물적으로 가까운 연극에게서 오늘날 관객이 원하는 기대치인지도 모른다. 눈물을 닦는 일부 관객의 모습도 보였다. 어쩌면 가장 초보적인 감정선 자극에 대한 수요를 연극이 충족시켜줘야 하는지도 모른다.
<슬픈연극>은 한국인의 일반 정서로는 저항하기 힘든 코드를 그 외에 더 채택하고 있다. 극중 부부 중 남편의 고난과 최후의 불행, 그리고 "왜 하필 나란 말인가?" 같은 남편의 대사는 설령 그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은 관객이어도 자기감정을 이입하기 쉬운 대사다. 또 출연진을 한쌍의 부부 2인으로 한정한 점도, 비록 혼인률이 떨어지는 한국 사회이지만 결혼을 신성한 과제로 오랫동안 굳게 믿는 공동체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배역 설정일 수 있다.
연극 후반에서 기념 촬영을 위해 사진기를 미숙하게 매만지는 아내에게, 바른 작동법을 알려주는 남편의 배려 장면에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아들(한석규)이 TV리모콘 사용법을 연신 잊어버리는 아버지(신구)에게 작동법을 가르쳐주다가 화를 내고는 뛰쳐나가는 장면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슬픈연극>은 일반인의 보편적 감정선을 위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의 대중 호소력은 내가 흔히 조건반사적 저항감을 갖는 감정과잉 코드에 안주하고 있다. 특히 미디어의 속도만큼 감정선도 다변화 된 오늘날, 스토리텔링을 실물보다는 스크린을 통해 관객이 접수하는 오늘날,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라는 감정적 코드를 인지도 있는 배우들을 근접거리에서 관람하는 매력에만 한정한 것은 왠지 안일해 보인다. 아마 이 점은 스토리텔링을 미디어로 풀어내는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훨씬 불리한 처지인 연극 전체의 아주 오랜 딜레마일 게다. 어쩌다가 눈에 띠는 연극전단이나, 더러 초대장을 보내오는 연극을 살펴보노라면 신파적 유모나, 불행한 죽음, 혹은 섹스 스토리의 선정 코드에 편중된 연극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마 보편적 대중의 정서를 고려한 연극의 생존 문제 때문이리라. 연극의 연명을 위해 대중 기호를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나, 지금의 연극은 '연기, 감정선을 자극, 빈곤한 무대예술'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대안을 찾아야할지도 모른다. 국내 음악인들이 만든 오페라를 보며 느끼는 '비 동시대성'을 어제 관람한 연극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다.
ps. 극중 배우가 객석을 향해 "연탄 가스 안 마셔보셔죠?"라고 묻자, 많은 수의 관객이 "예"라고 답하는 걸 듣고 살짝 놀랐다. 나는 연탄세대라 연탄 가스를 수차례 마셔봤다. 또 1979년 박정희 사망 때 엉엉 우는 엄마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도 했으며, 외환 위기때는 실제로 가정형편이 위축된 경험도 했다. 내 생물학적 코드가 언제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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