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빈센트 반 고흐 평전 : 불꽃과 색채>(이상북스 2013) 평문, '반 고흐 브랜드와 거리두기'



*  <빈센트 반 고흐 평전 : 불꽃과 색채>(이상북스 2013)에 평문을 썼는데 지난 주 책이 서점에 깔렸다. 아래는 내가 쓴 글로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반고흐 브랜드'(엮인글)의 보강판 쯤 되는 평문이다.



반 고흐 브랜드와 거리두기



반이정 미술평론가


내 안의 양가감정이 반 고흐 비평을 주저하게 한다. 그 양가감정은 현실의 조건들이 만든 것이다. 반 고흐는 19세기 네덜란드 태생 화가의 이름이지만 20세기 이후로 줄곧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독보적인 미적 성취를 이뤘음에도 비운이 드리운 지난 생애와 견제장치 없이 과대평가되는 현재의 위상. 이 모두가 불편한 진실이다. 반 고흐에 대한 모순된 시각의 원인은 생전과 생후에 극단적으로 반전한 평가에 기인한다.

세간에서 반 고흐와 관련하여 쏟아지는 거액의 수치들은 우상숭배의 기반을 단단히 굳혔다. 미술 경매 세계 최고가 기록 갱신의 최전선에 그의 유작이 항시 선전하는 사실이나, 작품을 항공으로 태울 경우 만일에 대비해 여러 비행기에 작품을 나눠 운송한다는 전언이나, 비행기 폭발에도 보호할 수 있는 초강력 크레이트에 작품이 실린다는 사실과 작품당 1천억원대 운송 보험에 가입한다는 순회 전시의 후문 따위도 마찬가지이다.

반 고흐 유작의 겉과 속에는 정상인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요인들이 빼곡하다.
그의 그림에 관한 무수한 해설문마다 색감과 붓질을 언급하는 건, 그림의 표면이 남다른 매력을 지녔다는 의미일 테고, 그의 생전 외면된 작품이 사후 높은 평가로 역전된 현상이나,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6백통 넘는 서신은 대중의 연민을 끌어내기 충분한, 그림의 표면 바깥의 요인이다.

반 고흐 연보는 전업 예술가로 활동한 10년간을 이동 거주지별로 구분한다. 자신의 고향 네덜란드 화단의 17세기 화풍을 답습하여 어두운 화면 일색인 네덜란드(1881-1885) 시기, 이와 대조적으로 인상주의의 나라 프랑스에서 밝은 색채로 전환하는 파리(1886-1888) 시기, 동경하던 일본 판화의 또렷한 윤곽선과 신인상주의의 보색대비를 화면에 투영한 아를르(1888-1889) 시기, 흔히 ‘불타는 붓놀림’으로 알려진 반 고흐의 브랜드가 완성 단계에 이르는 생레미(1889-1890) 시기, 생의 마지막 70여일을 머문 오베르(1890) 시기로 분류된다.

정규 예술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반 고흐의 10년여의 작업 여정은 19세기 당시의 자율학습법 즉 유명화가의 인쇄본을 베껴 그리는 임화(臨畵)에 의존하고 있었다. 임화를 ‘해석적 번역’으로 그는 간주한 것 같다.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도미에처럼 타지 태생 예술가의 작품을 베껴 그리면서 모범이 되는 화풍을 익혔다. 전업 화가가 되기 전, 예술품을 복제하는 구필상회 Coupil & Cie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그는 미술관을 구경하며 선배 작가의 화풍을 두루 접하며 시간을 보냈다.

반 고흐의 독보적 화풍에 영향을 준 것은 1870년대부터 헤이그에서 수집한 <도해와 삽화로 전하는 런던뉴스 graphic and illustrated london news>다. 회화에선 만나기 힘든 삽화의 선명한 선 묘사는 파리와 아를르에 머무는 동안 큰 영향을 받은 일본 목판화의 간결한 선 처리 기법과 상통하는 미학일진대, 그의 화면으로부터 손쉽게 그를 연상하게 되는 반 고흐 브랜드이기도 하다.

화상(畵商)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회고록에서 당시 화상들로부터 ‘거미줄 같은 그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고 적은 반 고흐의 ‘불타는 붓질’ 자국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또 다른 브랜드가 되었다. 이 기법도 화면에 물감을 두텁게 올리는 아돌프 조제프 토마 몽티셀리의 임패스토 기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이다. 생전 몽티셀리를 동경한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몽티셀리에 관한 첫 화집 출간에도 적극적이었을 정도였다.

색채와 임패스토 기법이 남긴 반 고흐의 화면은 그에게 고정 팬을 만들었다. 인상적인 화면에 버금가게 반 고흐의 인기를 보장한 건 반 고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다. 친동생 테오가 부양해준 그의 궁핍한 삶, 자해에 이어 자살로 이어진 정신질환, 생전 저평가된 작품이 생후 최고의 현대화가 반열에 오른 반전 드라마까지, 반 고흐는 후대의 연민을 살만한 드라마를 지닌 예술가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6백편의 서신을 포함해서 생전에 남긴 8백여 통의 서신이 고스란히 보존된 점도 그의 일대기를 신화로 구축하는 사료가 되었다. 그가 쓴 편지에는 그림의 주제에 대한 고민과 그림의 진행 과정 등이 시시콜콜 기록되어 있으며, 더러 삽화까지 편지지에 그려 넣기도 했다. 말하자면 편지가 작가의 육성마냥 그림에 관한 객관적 해설서가 된 거다. 사료적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27세에 전업 화가의 길을 택해 10년의 짧은 창작을 끝으로 세상을 뜬 반 고흐의 이른 죽음이나 생전에 남긴 8백통 이상의 서신은, 그의 유작이 누리는 무한한 명예를 보증한다. 왜냐하면 그는 편지에 남긴 진술을 끝으로, 영원히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후대가 채울 수 있는 큰 여백이 남은 셈이다. 무수한 각주 혹은 부풀린 예찬이 매달리는 건 예상된 귀결이었다. 모델을 살 형편이 못 되어 많은 자화상을 남겼음에도, 다른 화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남긴 자화상은 남다른 자의식의 예술가로 해석되는 괴이한 빌미가 되었고, 작가의 의도야 어떻건 반 고흐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자 세간의 호감도 한층 증강되는 결과를 낳았다.

예술의 평가는 현재의 이해관계에 좌우된다. 생전 작품 세계를 외면 받은 반 고흐의 짧고 불우한 삶과는 대조적으로 경매 최고가를 갱신하는 그의 유작으로 미학적 경제적 수혜를 현 세대 사람들이 나눠 갖는 서늘한 풍경은 예술과 현세대 간의 밀접한 이해관계를 명증하게 보여준다. "예술가는 종교 모델을 내면화하고, 전기 작가들은 그 모델을 활용하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델에 동화되는 것."이라는 해석이 미술사가가 아닌 사회학자 타탈리 에니히의 입에서 나온 사정도 같은 배경이리라.

반 고흐에 대한 선대의 외면 만큼, 후대가 꾸준히 조성하는 반 고흐 불패신화도 예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반 고흐는 동시대에 어떻게 수용해야할까. 주변의 몰이해로 외면 받은 천재화가로 이해해야 할까? 그런 해석이야말로 대중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손쉬운 답변일 것이다. 전해지는 바, 반 고흐의 생애는 굵은 안료들로 뒤엉킨 화면처럼 궁핍 고독 정신병 자해 자살과 저평가로 뒤엉켜있다. 그의 작업은 물론 남달랐지만, 이른 사망 때문에 남겨진 해석의 여백을 후대가 이해관계에 얽혀 과장된 예찬으로 끊임없이 채우는 점은 직시하자. 반 고흐는 편지에서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달성한 독보적인 화풍도 무수한 고전회화 인쇄물을 베끼는 과정에서 수련된 것이며, 색점으로 구성된 창의적인 화면은 신인상주의 점묘파를, 두텁게 안료를 올리는 기법은 바르비종파의 디아즈 드라 페냐와 몽티셀리의 선례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였다.

반 고흐를 직시하려면 주변의 손쉬운 경거망동에 흔들리지 않고 그의 발전상을 초연하게 지켜보는 것일 게다. 배타성 없이 여러 유파(流波)의 스타일을 융통성 있게 차용한 반 고흐의 10년간의 태도를 직시하여 제 삶의 태도로 수용하면 될 것이다. 반 고흐는 브랜드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그 브랜드는 개개인의 태도로 수용하긴 어려울 브랜드이다. 왜냐하면 후대가 끊임없이 매단 무수한 각주들로 완성된 브랜드이니 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