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930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85회분. 이 연재물의 첫회분(엮인글)에서 자전거를 다룬 이래 다시 한번 자전거를 다뤘다.
대열 이탈
상좌. 할로윈 데이에 풍선 스모 복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는 무리 2009년
상우. 플랫랜드 BMX 묘기를 보이는 라이더
하. 키다리 자전거를 타고 즐기는 창시합 놀이
프레임 하나에 바퀴 둘로 구성된 자전거의 기본 구조는, 네 바퀴의 안정감과 엔진 동력을 지닌 자동차와 비교하면 열세에 놓인 기동수단이다. 무사고 안전 운행과 만족스러운 속력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오랜 시행착오의 산물이 오늘날 자전거의 모양새일 것이다. 그럼에도 최적화된 자전거의 표준에 고의로 저항하는 도전들이 끊이지 않는 건 역설처럼 보일 게다. 낮은 차체로 설계된 BMX는 앉을 일이 통 없기 때문에 안장은 무의미한 수준으로 턱없이 낮게 붙어있다. BMX는 기동수단으로 한정된 자전거의 가능에 또 다른 지평을 시험한 발명품이다. BMX의 존재 이유는 인체와 기계가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균형미의 과시에 있다. 구를 목적으로 제작된 바퀴 하나를 축대 삼아 자전거와 인체를 빙빙 회전시키는 묘기는 플랫랜드 BMX의 기본 묘기이다. 그러나 BMX는 하위문화를 형성할 만큼 동호인의 수가 많고, 공식 생산라인까지 갖출 만큼 주류에 편입된 경우이다.
이에 반해 키다리 자전거(tall bike)는 사용자에 의해 자작되며 자전거 프레임 여럿을 층층이 쌓아올리는 노하우만 공유할 뿐 표준 모델은 없다. 드물게 5미터 높이의 키다리 자전거를 만나는 이유이다. 그래서 키다리 자전거는 극단적인 비주류이다. 바닥에 거의 내려앉은 BMX의 구조와는 달리 위험할 만큼 높게 치솟은 차체 때문에 위험지수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위험의 대가는 높고 드넓은 시야로 확보된 전지적 관찰자 시점이다. 일반 자전거 주행자의 시야에서 멀찌감치 이탈한 점에서 키다리 자전거의 눈높이는 차라리 비행기 조종사의 시야에 견줄 만하다. 한번 위험을 무릅쓴 키다리 자전거는 한발 더 나아가, 중세 시대 귀족의 유희인 마상 창시합을 계승한 키다리 자전거 창시합 놀이까지 즐긴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모든 종류의 자전거는 바람 저항을 최소화 하도록 설계된다. 바람 저항에 취약하면 속도, 안전, 즐거움 모두를 보장받지 못해서다. 전문 자전거 복장 역시 바람 저항을 낮추려고 민망할 만큼 인체에 달라붙는 스키니 투성이다. 이에 반해 고의로 바람 저항을 높여 주행 능력을 떨어뜨리는 괴짜들도 있다. 공기 주입으로 육중한 일본 스모 선수의 체형을 모방한 일명 ‘스모 의상’을 착용한 채로 자전거를 모는 라이더들이다. 바람 저항에 최적화 된 자전거의 납작한 설계가 무력화 된다. 퉁퉁한 풍선옷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는 태도는 남이야 뭐라 하건 자기 유희를 중시하겠다는 거다.
BMX, 키다리 자전거, 풍선 스모복장 라이딩, 표준에 변형을 가한 이 자전거 하위문화들로부터 자전거 정신의 원형을 보게 되는 건 역설이다. 자전거 정신의 원형이란 대열을 이탈하는 태도다. 차량 정체로 꽉 막힌 도로의 갓길을 따라 홀가분하게 자전거를 몰거나 뻥 뚫린 도로에서 자기 옆을 쏜살같이 지나는 차량을 자전거에서 바라볼 때, 일부는 평균적인 대열에서 자신이 일탈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BMX, 키다리 자전거, 풍선 스모복장 라이딩은 이보다 한층 극적으로 대열 이탈을 자초하는 것, 즉 자전거의 출발점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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