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를 육성하는 훈련이란, 마음과 머리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인간을 완전히 기계의 일부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니 통신사한테는 손가락 끝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고, 손가락 끝의 테크닉이야말로 생명이다. 22
통신사의 문장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그 다음으로 간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틀을 넘어서는 내용이라면 마땅히 국제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 얘기해야 할 것이다. 23
-- 나의 문체
사실은 그리 대수롭지 않다. 딱히 시 자체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시의 주변에 모여 있는 작자들이 남자 샹송 가수처럼 샘나는 패머리들이었다는 그런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나에게는 더없이 그럴싸한 이유였다. 늘 그렇게 나는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는 식으로... 26
이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이크를 통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연설의 내용도 아니고, 말투처럼 화려한 몸짓 손짓도 아니고, 말을 하는 중에 그(미시마 유키오)가 열심히 입을 쩝쩝거리는 점이었다. 필시 긴장한 탓에 입 안이 바싹 말라, 혀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런 그의 몸짓을 간파한 나는 이 쩝쩝거림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주위에 뿌린 모든 휘황찬란한 언동보다 가장 선명하게 그를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직관했다. 31
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작가생활을 하거나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라고 믿는 자들 중에 많은 것 같다. 34
--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
통신사 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불쑥 소설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한 가지 기묘한 현상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들이 주로 작가의 범상하지 않은 구석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곤드레가 되어 깊은 밤 대로에서 잠을 잔다거나, 처자식은 내일 먹거리도 없이 고민이라는데 태평하게 놀러 다니는 기행을 아주 대단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마치 그런 기행의 횟수가 소설의 깊이를 재는 바로미터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49
-- 시각적 이미지
회사라는 조직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니, 당시의 나로서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천국에 가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수많은 여자들과 친분을 맺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찌만, 성가신 일 없이 혼자 살아보고 싶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65
-- 소설가의 독백
요컨대 서로 다른 많은 작품에 대해 주저없이 비평을 가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을 던져보고 싶은 것이다. 완성도가 높건 낮건 각 작품은 나름의 인생을 담고 있고 다양한 인종-국적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살아온 과정의 차이에 따른 분류-으로 가득한데, 간혹 옆길로 새기는 했어도 결국 돌아와 한길을 걷고 있는 인간이 그렇게 많은 인종을 향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비평을 가할 수 있늘 것인가. 자기 능력에 부친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전제 없이, 일반 독자들보다 깊이 꿰뚫어볼 수 있단 말인가. ... 아무튼 한 작품을 둘러싸고 수많은 오해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이고, 독자들 역시 많든 적든 오해를 하면서 작품을 읽을 테지만, 평론가들의 오해는 활자화되어 세상에 보여진다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의 오해와는 다르다. 72-73
-- 오해에 대한 기대
그런데도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펜을 쥔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제된 문장으로 시각적인 소설을 지향한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중략)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왜 쓰는가’란 테마에 들러붙어 성공을 하는 사람들은 늘 평론가들이고 절대로 소설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럭저럭 십 년 동안이나 내가 이 세계에 머물렀던 것은 우습게도 ‘왜 쓰는가’를 거의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86-87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나라고 하는 정신과 육체를 지닌 소설가는 그저 단순히 이미지의 수신기이며 발신기면 족하다는 애매한 지론 한 가지를 마련해놓고 자신의 소설을 써나가고 있다. 87
소설가가 인생의 숙련자임을 뜻한다는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지나치게 ‘마음’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알아주는 독자가 있을 것이라는 행복한 자세가 오히려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외면하게 한 것은 아닐까. 88
=> 03 팝아트와 관련 인용.
한 시대나 국가가 붕괴할 때는 젊은이들부터 형편없어진다는 설이 있다. 고대 로마가 그랬고 청나라도 그랬다. 먼저 젊은이들이 거역을 모르게 된다. 142
-- 소설가의 각오
(무능한 순수문학 작가들을 탓하며) 그들은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여자 같은 짓거리를 하는 데도 정도가 있다. 소설가라는 남다른 직업, 외로운 직업을 스스로 선택했으면서도, 샐러리맨이나 다름없는 끈적끈적한 교제를 하면서 자신의 입장과 지위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것이다. 224
-- 소설가란 원래 모두가 이색적이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로 결정한 그 무렵.... 이유는 다 한가지, 자본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펜과 종이, 사전과 시간, 그리고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결론이 날 직종이었다. 그 점이 다른 예술과는 다른 매력이었다. 274
근무중에 조금씩 쓰는 일은, 당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었다. 쓰고야 말겠다는 단단한 의지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육 개월 후, 나는 정말 소설가가 돼 있었다. 276
나는 앞으로도 볼펜으로 소설을 쓸 것이다. 독일제 고급 만년필이나 이름이 새겨진 원고 용지를 사용하는 일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그때 나는 필자이긴 할 테지만 이미 소설가는 아닐 것이다. 277
-- 볼펜으로 쓰는 소설
새로운 문학상을 마련하여 아이돌 가수를 제조하듯 억지로 문학스타를 만들어내려 한다. 282
문학이나 예술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멋진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상식을 깨닫기까지 일본인은 아득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마늠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한다. 284
-- 문예지를 비웃다
옛날에 무선 통신사가 되려고 모르스 부호 연습을 했는데, 소설도 그와 비슷해요. 글 솜씨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향상시키려면 매일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 숙달됐다 싶어 연습을 게을리 하면, 금방 둔해집니다.
소설가란 얼마만큼 개인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의해 승부가 결정됩니다. 그것도 고독을 사랑한다든가, 고독에 굴복한다든가 그런 형태가 아닙니다. 고독 그 자체를 직시하고, 그것과 맞붙어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불꽃으로 써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297
-- 고독과 대치하며
이윽고 매너리즘에 빠져 데뷔작 수준을 넘지 못하는 작품만 줄줄이 엮어내면서 나이가 들어간다. 그러면서 인맥 같은 것, 어디서 주워들은 문학론들, 오래도록 소설가로 통용되었다는 거짓 자신감 따위로 자신을 무장하게 된다. 문학은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정치적인 획책에 가담하여 대가의 반열에 끼어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죽어간다. 이것이 순수문학이고 소설가라면 얼마나 한심하고 어이없는 일이겠는가. 324
더욱 중요한 것은 ‘고(孤)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창작이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은 소설을 지향하며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행위이다. 당연히 마닥모를 불안감이 따라다닌다.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고 누군가와 어울리고 싶은 기분도 든다. 그러나 그러면 끝장이다. 유능한 젊은 작가가 데뷔와 동시에 문단의 파벌에 종속된 예를 알고 있다. 작품의 질은 선배보다 월등한데 동료들의 꾀임에 빠져 그 파벌의 말석에 앉아 쥐꼬리만한 안심을 보장받았지만, 그 순간부터 그 신인의 소설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회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창조하지만, 소설은 오로지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다. 326-327
-- 소설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돈은 사탄과 같다. 돈이 너무 많으면 소설을 쓰지 않게 되고, 돈이 너무 없으면 소설을 쓸 수 없다. 큰돈이 들어오면 보여야 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빚에 쪼들리면 보여야할 빛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이삼십대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렇다. 342
이전에 약속한 에세이를 한 해에 세 편 정도 썼지만 나머지 시간은 온통 소설에 투자했다.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목구멍에 거미줄을 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책상에 앉아 머리와 마음을 풀 가동했다. 일요일에만 휴식을 취했다. 그 덕분에 기분좋은 계산착오가 생겼다. 삼 년 예정이었는데 이 년 만에 탈고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어서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돈이 조금 남았다. 마지막 한 장을 완성했을 때의 감상은 이러했다. ‘하면 되는구나.’ 쓰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다짐했던 거창한 각오를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확고한 자신감이 수중에 있었다. 343
-- 작가의 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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