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1일 일요일

'출연료 미지급'이라는 재능기부 (문화공간 9월)

* 출연료 없는 방송 출연 제안에 관한 지난 7월 체험 포스팅(엮인글)에 살을 붙여 <문화공간>(9월. 366호)에 기고했다.  



 '출연료 미지급'이라는 재능기부


반이정 미술평론가   

MBC 교양방송 <문화사색>에서 노르웨이 상징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한국 전시회 개최에 맞춰 아나운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일요일 오전 예술의 전당으로 나올 수 있냐고 방송사에서 내게 청탁 전화를 걸어왔다. 얘기를 쭉 듣던 내가 출연료에 관해 묻자 “사실 출연료가 없다. 그 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양해를 구하더라. 나는 출연이 곤란하겠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고 서로 없던 일이 됐다. 많은 거대 방송사들이 스튜디오로 출연자를 직접 오게 만드는 경우가 아닌 한, 전문가의 견해를 카메라에 담을 때 출연료 미지급을 관행으로 생각한 채 출연을 요청한다. 비단 MBC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며칠 후 SBS 교양프로그램 <컬처클럽>에서는 목동 사옥에서 2시간 내외의 녹화가 예정된 방송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웬걸. SBS는 한술 더 떴다. 청탁 요청 말미에 “교양프로여서 제작비가 적어 출연료가 책정되어 있지 않다.”고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닌가. 사옥으로 사람을 불러 2시간가량 붙들어 촬영까지 해놓고 금전적 대가를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나오는 경우는 처음 경험했다.

내가 겪은 이런 사정을 SNS에 짧게 공개했더니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이 내 사연을 무한 RT(리트윗)했다. 방송사와 전문가 사이에 맺어진 이 굳은 관행에 대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외부인에게 이것은 전례 없는 부당거래로 느껴진 모양이다. 그러나 방송사와 해당분야 전문가 사이의 부당 거래는 화석처럼 굳은 관행으로 통용된다.

방송사가 전문가에 출연을 부탁할 때마다 “아주 간단히 몇 마디만 해주시면 되거든요.”라고 양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짧건 길건 출연에 앞서 나는 요청받은 주제를 미리 검토해야 하며, 방송사가 내게 직접 찾아온들 나는 그 시간을 비워둬야 하므로 결국 인건비가 나가는 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급기야 방송사로 사람을 불러 몇 시간씩 촬영을 하고도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고 버티는 단계까지 등장한 것이다!

스튜디오로 불러다가 2시간씩 사람을 붙잡아놓고 출연료는 고사하고 차비조차 대주지 않는 이런 불공정 거래가 어떻게 단단한 관행으로 굳을 수 있을까? 방송사의 요구를 거부한들, 출연료 없이 카메라 앞에 서줄 전문가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리라.
방송사가 출연료 없이 전문가에게 출연 요청을 할 때에는, 내심 이런 속내가 작용해서다.

“당신이 촬영에 응한 대가는 당신의 방송 출연 아니겠나. 그게 곧 보상 아니겠나?”
“당신이 섭외를 거절한들 카메라 앞에 서줄 다른 전문가들이 있다는 건 당신도 알 텐데.”

방송 출연을 일종의 경력으로 묵인하는 점에서 방송사와 출연자 모두 같은 입장일 거다.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대중이 세상과 만나는 시대에, 방송 출연자가 누릴 그저 한시적인 효과마저 부인할 순 없으리라. 더구나 자신의 전문 영역에 관한 짧은 견해를 방송에서 밝히는 것도 출연자에게 기쁜 일일 수 있다. 전통 법이론에 따르면 출연료는 전적으로 당사자 사이의 합의 문제다. 출연료에 합의를 했다면 주는 것이고 하지 않았다면 주지 않는 게 법이다. 상호 묵인이 만든 괴상한 상거래 관행이 생긴 배경은 이렇다.

아무리 제작비가 낮은 교양프로여도 출연료는 책임PD가 책정하기 나름일 것이다. 방송 출연료에 관한 공정한 해법을 나는 현재 알지 못한다. 방송사가 출연자에게 예산 일부를 배정해주기를 막연히 기다리거나, 자기 소신대로 출연을 연신 거부하거나. 설마 이 둘이 해법은 아니리라. 미디어 시대의 을인 출연자가 방송사라는 갑을 무작정 외면한다고 될 일 역시 아니다. 그런 조건을 갑이 악용하다보니 괴상한 관행이 굳어버린 것이다. 

방송사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스튜디오까지 제 발로 찾아오게 해서 2시간씩 붙잡아놓고 금전적 보상을 그저 방송 출연으로 대신 눙치려는 거, 심하지 않나? 소박한 내부 지침이라도 마련하자. 출연료가 전무한 출연 요청을 하느라 항상 방송작가들이 미안한 목소리로 전화 걸게 만들지도 말자. 무수한 시청자가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고 경악해서 무한 RT하는 소동도 없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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