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1일 금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예술가의 서명 (씨네21)

* <씨네21>(961호)의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연재가 100회분을 채우게 되었다.



서명 플라시보





좌. 마르셀 뒤샹이 1950년 서명한 원본 <분수>(1917년)의 복제본
우. 피카소의 서명을 차용한 어느 레스토랑



소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한 사건은 현대미술의 본격 태동을 알린 신호탄으로 해석 되지만, 실제로 당시 전시장에서 문제의 소변기를 만날 수는 없었다. 긴급 위원회의 논의 끝에 소변기의 진열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흑백사진이 남아 우리가 문제작의 외형을 가늠할 뿐이다.

뒤샹의 작품 <분수>의 가치는 대량생산된 공산품이 유일무이한 예술품으로 변신하는 요건으로, 예술가의 손재주가 아니라 예술가의 발상을 든 점에 있다. 손재주가 아닌 발상을 미적 독창성의 근원으로 본 입장은 뒤샹 이후 미술계 지각 변동의 원점이 되었다. 기성품으로 들어찬 전시장은 오늘날 그저 익숙한 풍경이다. 백색 소변기의 표면에 뒤샹이 쓴 가명, 리처드 머트(R. Mutt)는 소변기에서 예술품으로 존재가 변했음을 증언한다. 기성품을 미술품 대열에 합류시키는데 필요한 것이 오직 예술가의 발상뿐이라고 믿은 뒤샹이었던 만큼, 작품이 된 소변기라는 물리적 사물을 그는 소홀히 여겼다. 

그의 무관심과 관리 소홀 덕에 신화적인 문제작 <분수>의 원본을 우리는 볼 수 없다. 1917년 원본 <분수>는 분실 되었고, 현재 여러 미술관에 17점의 <분수> 복제품들이 전시 중이다. 원본이 사라진 후에야 <분수>의 미술사적 의미가 깨달은 후대 미술인들이 전설의 복제품을 수요한 탓이다. 뒤샹이 추가로 서명한 17개의 소변기 복제품은 원본으로부터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복제품들이지만 <분수>의 원본성을 승계한 것으로 간주된다. 급기야 1950년에 제작된 최초의 복제품은 1917년 사용된 소변기와는 모양새마저 크게 다른데도 말이다. 서명의 위력은 이 정도다.

파블로 피카소의 전시회 배너에는 육필로 휘갈긴 피카소의 서명이 도판처럼 쓰인다. 피카소의 육필 서명은 개별 작품들보다 인지도에서 앞서며, 피카소 작품 전체에 대한 대표성까지 행사하기 쉽다. 전시회 배너에 피카소의 작품보다 선호되는 그의 서명은 일종의 국제 공용어로 사용된다. 심지어 피카소의 서명은 미술판이 아닌 분야에서조차 ‘기품 있는 기호’로 이용된다.

위대한 예술가도 범작을 남긴다. 대표작의 잔상과 서명의 후광에 힘입어 위대한 예술가가 남긴 숱한 범작들도 은연중 과대평가되곤 한다. 뒤샹이 제작한 여러 문제작들은 그의 관리 소홀로 원본 자체가 분실되거나 파손된 경우가 많았다. 예술품의 제작 행위나, 예술품을 공인하는 서명 행위를 뒤샹은 환멸 혹은 풍자의 대상으로 봤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수십 년이 지나 그가 다시 서명한 무수한 복제품들이 미술관에 입성한 사건은 어떻게 봐야할까? 후대에 그가 여러 복제품에 서명을 남긴 행위는, 사물과 예술의 경계선을 헐겁게 만든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긍심과 뒤샹 특유의 장난기가 뒤엉킨 결정일 것이다. 한 예술가의 범작 앞에서 감동을 느꼈다면, 서명이 만든 플라시보 효과일지도 모른다.


ps. 국내에서 흔히 <샘>으로 번역되는 뒤샹의 <fountain>은 <분수>로 표기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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