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문화회관에서 발행하는 <문화공간>(7월호. 통권364호)의 '말말말' 코너에 기고한 글.
'아트 스타 코리아' 출연 후기를 정리하고 싶어서 쓴 글.
‘아트 스타 코리아’ 딜레마
반이정 미술평론가
<아트 스타 코리아>(이하 아스코)는 3달여 방송을 타다 지난 6월말 종영한 국내 최초의 미술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매주 새 미션을 도전자들이 3일 안팎의 기한동안 제작에 관한 멘토링과 완성작에 대한 심사를 거쳐 매주 한명씩 탈락자가 정해진다. 멘토와 심사위원으로 방송에 출연한 당사자로서 방송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순수예술에 경쟁구도를 도입해서 우열을 가르는 편성은 의분을 촉발하기 쉽다. <아스코>가 다른 서바이벌 프로들에 비해 가혹한 시선을 받는 이유일 거다.
손쉽게 잠재울 논란부터 다루자. ‘예술의 우열을 순위로 평가’하기는 <아스코> 논란의 중심점이지만, 제도 미술계에서 행하는 미술 시상식의 일반적 방식이기도 하다. 미술상뿐만 아니라 창작스튜디오 입주자 선정이나, 미대생의 학점이 과제물의 우열에 따르는 점도 ‘예술의 우열을 순위로 평가’한 점에선 동일하다.
비판의 목소리는 방송 논리를 빼고, 미술의 엄격한 당위에 따라 <아스코>를 꾸짖는다. 일리 있는 지적도 있지만 <아스코>가 예능에 근거한 방송인 점을 외면한 채 인습적인 비판만 반복 되는 인상이다. 촬영현장은 방송의 공식과 미술의 공식이 충돌하면서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는 분위기다. 방송에 투항하는 순간 전혀 상이한 성격의 미술행위로 변한다. 해서 ‘미술계의 논란 분분’식의 비판은 쟁점을 잘못 짚었다고 본다.
작품 완성에 주어지는 3일여의 시간은 미술 현장에선 비정상이어도 방송에선 가능하다. 순발력과 재치 있는 능력에 유리하다는 지적 역시 두 요건이 현대미술에게 빼놓기 힘든 미덕인 점을 고려하면 꼭 비난받을 요건은 아니다. 방송에서 상위 미션까지 도달한 도전자 중에 이미 화단에서 호평을 받은 이들이 많이 속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방송의 그릇 안에 현대미술의 실체를 포괄적으로 충족시킬 순 없다. <아스코>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예능방송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이 예능의 소재가 되어도 되는가? 방송에 미술인이 가담하는 게 옳은가에 관해 묻는 게 올바른 질문이다. 제한 조건이 많은 촬영 일정 속에 최상의 아티스트를 발굴하긴 어렵다. <아스코>는 숨은 아티스트 발굴을 내세웠으나, 실제 방송 가치는 현대 미술의 실체를 훔쳐보게 만드는 데 있다. 적어도 보편적 시청자가 떠올리는 인습적인 미술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나는 이해부득의 작품을 날로 보여주는 건 변별점이다. 현대미술을 자발적으로 즐기는 인구가 극소수에 불과한 한국은 초대형 현대미술 행사를 지방자치단체마다 개최한다. 관객이 없는 초대형 미술축제가 열리는 이 모순된 현상에는 무감각하면서, 창작 경쟁을 송출하는 방송에는 엄격하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의 대중적 집중에 초대형 미술행사가 유리할까, 방송이 유리할까? 최고 작품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방송의 형편이 훨씬 낫다.
현대미술은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큰 주목을 받는 전시는 드물며, 그마저 소수의 초대형 아티스트가 주도한다. 그건 미술이 전문 분야여서이기 보다, 미디어 시대에 긴 정체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종래 미술 고유의 권한을 다른 매체들이 대체하는 현상도 잇따르고, 미술은 다른 장르와 결합되어 변종을 낳기도 한다. 이처럼 미술의 분화는 건강한 변신이지만,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현대 미술이 직면한 매체 현실은 이렇다. 미술이 예능 방송의 장치로 일회적으로 출연하는 게 마냥 탓할 일인가 싶다. 방송과 결합한 미술은 성격이 상이한 미술로 제시된다.
<아스코>의 방송 가치는 아티스트 발굴이 아니라 현대미술에 대한 환기라고 밝힌 만큼, 보도 내용 일부를 반박한다. “시청률은 1%도 안되는 수준”을 근거 삼아 “<아스코>는 미술계 논란 외에는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비난한 <한겨레>의 기사다. 무수한 미술축제와 자발적 관람 인구가 비대칭인 우리나라 실정에서, 시청률을 볼모로 현대미술 서바이벌 방송을 질타하는 건 정직하지 않다. 시청률을 트집 잡는 게 방송을 더 선정적으로 내몬다는 걸 정작 모르는 걸까? <아스코> 최종 경쟁자 3명의 전시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것에 관해 같은 지면은 “시민과 국가가 부여한 공직의 권위, 권위가 작동되는 장소를 자의적으로 내어준 것”으로 “공공성을 상실해가는 미술계의 징표”라고 탓한다. 이렇듯 자못 당위에 기댄 순진한 비평은 진실을 그려내지 못한다. 올해의 작가상을 민영방송사 SBS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건 어떻게 봐야할까? 올해의 작가상이 벤치마킹한 영국 터너상은 지상파 방송 ‘채널4’가 후원 하고 시상식까지 생중계하는데, 그것이 현대미술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다. 현대미술은 소수 취향의 섬이 되어 더러 잊히는 존재다. 부정행위만 없다면 대중적 환기를 위한 미술의 방송 외유는 탓할 일이 아니다.
<아스코>는 딜레마다. 출연진의 의중이야 어떻건 새로운 진실을 창조하는 편집의 신이 지배한다. 현장의 도전자들은 미션에만 몰두하지만, 방송은 창작 과정이나 작품보다 갈등 협력 좌절 같은 인간적 드라마에 편중된 화면을 내보낸다. 현장의 멘토링은 2시간 넘게 진행되지만, 방송은 감각적인 논평만 5분 이내로 압축 편집한다. 방송 논리와 미술 논리가 충돌하면서 공존하지만, 엄연히 방송 논리가 앞선다. 이런 매스미디어를 외면한 채 의연히 홀로 가도 괜찮다. 그렇지만 매스미디어를 밀고 당기는 관계로 설정하는 것도 정당하고 시의적인 선택이다. 출현 초기에 팝아트는 천박하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지금처럼 팝아트의 형편이 역전된 데에는 의도야 어떻건 미디어 친화적인 시대 흐름에 적응한 예외적 현대미술로 평가되기 때문일 것이다.
----- 아스코 일지
CJ E&M로부터 첫 전화를 받은 건 2013년 7월로 그때는 새로운 방송의 자문 때문에 미팅을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 북유럽 여행 일정 때문에 실제 미팅이 성사된 건 8월 중순. 지원자들의 1차 포트폴리오 심사와 2차 면접 심사는 모두 11월에 진행됐다. 멘토를 도전자들에게 소개하는 별도의 촬영은 12월22일 새빛둥둥섬에서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첫 멘토링은 12월24일 촬영 되었고, 이때부터 스튜디오가 있는 파주로 매주 1회 왕복하는 일과가 시작됐다. 탑쓰리를 꼽는 마지막 파주 촬영은 2014년 2월14일이었다. 아스코의 프리뷰방송은 3월23일 나갔고, 3월27일 여의도CGV에서 제작발표회를 마친 후 3월30일 아스코의 첫방송이 나간다.
2013년 11월22일~24일까지 3일동안 1차 서류를 통과한 100여명에 대한 면접심사가 상암동 DMCC에서 진행됐다. 사진에서 면접 보는 도전자는 15명에 선정된 료니.
2013년 12월22일 새빛둥둥섬에서 처음 도전자 15명과 만남.
파주 스튜디오의 첫 멘토링 때 내 첫 멘티는 서우탁이었다.
2014년 2월14일 아스코의 파주 스튜디오 촬영이 종료된 탑쓰리를 꼽는 마지막 미션 촬영. 함께 찍은 사람들은 아스코 방송 작가들.
2014년 3월27일 여의도CGV에서 아스코 제작발표회
파주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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